생태학적 상상력     -     김영무(金榮茂)

인간이 자연과 공동체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문명 비판적 평론이다. 문학의 방식으로 삶의 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점에 주목해 보자.

우리는 철옹성 같던 소련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와르르 허물어지는 것을 보았다. 소련이 내걸었던 것은 공산주의 공동체의 건설이었다. 남들은 공산주의 국가 하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 공산주의 사회 하면 수많은 공장의 굴뚝들이 떠오르고 그 공장 속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어딘지 자연과는 거리가 먼 건설 건설 건설 하는 구호가 난무하는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회의 모습이 떠오른다. 남들은 자본주의 국가 하면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자본주의 사회 하면 역시 어딘지 자연과는 거리가 먼 별별 기기묘묘한 상품이 와글거리는 백화점이나 슈퍼마켓과 소비자로 변한 인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렇듯 불구대천의 원수로 전혀 다른 것 같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따지고 보면 모두 다 배타적인 인간 중심 사상을 그 핵심적 바탕으로 깔고 있는 것 같다. 오직 인간의 안락과 편안과 복지라는 옹색한 지평에 갇혀서 이루어지는 생산 활동이라는 이름의 파괴 활동 또는 배타적 인간 중심의 경제 행위는 필연적으로 자연을 소외시키고 파괴하고 인간 아닌 다른 만물을 망가뜨리고 박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리하여 결국 다른 생명체들의 멸종과 더불어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쓰레기더미로 변하여 궁극적으로는 인간도 멸망하고 말 것이다.

인류가 그렇게 갈망해 마지않는 민주주의―문명과 야만, 흑인과 백인, 여성과 남성이 역동적으로 창조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이룩하는 인간 공동체, 즉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은, 앞서 비친 대로, 배타적 인간 중심주의 그 가운데서도 남성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삼고 있는 기계적 합리주의로는 결코 불가능하거니와, 삼라만상이 화해하여 공존하는 지구 만물 공동체, 삼라만상 공동체를 궁극적 전망으로 갖고서 나아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오늘의 소비 만능의 상업주의적 자본주의와 생태 파괴적 공산주의 전개 과정이 보여 고 있듯이 가부장적 인간 중심주의의 필연적인 결과는 인종 차별, 남녀의 성 차별, 계급투쟁, 지구 파괴, 생명 파괴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병적인 사고방식이지 참뜻에서의 과학적 사고방식도 그 무엇도 아니다.

그런데 인간 내면의 저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인간의 이런 창조 질서 왜곡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삼라만상이 창조적 긴장과 균형을 유지하며 이룩하는 우주 만물 공동체에의 꿈으로 인간을 이렇게 은밀히 그러나 불가피하게 부르는 것, 이것은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적 운명과도 같은 것이요, 만물의 꽃인 인간이 창조주에게서 받은 신비의 선물이다. 그리고 이 신비로운 은총의 선물이 다름 아닌 녹색 상상력이요, 생태학적 상상력이고, 이것은 모든 참다운 과학의 바탕으로 작용하며 또한 우리가 시에서 늘 만나는 원초적 충동이기도 하다.


풀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길을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있음의 제자리를 생각했다.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신진 시인 박형진의 <사랑>이라는 이 시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투명한 작품이다. 시 속의 화자인 나는 어느 날 가다가 자신의 옷에 날아와 앉은 풀여치 한 마리를 보고 모든 생명의 제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이 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우리가 길을 가는데 옷자락에 벌레가 날아와 앉으면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아마 대개는 공연히 소름이 끼치고 오싹해서 얼른 털어 버릴 것이다. 손으로 건드리는 것도 어딘지 켕겨서 막대기 같은 것으로 쳐 버리기 십상이다. 이 시 속의 화자인 나도 아마 처음에는 거의 본능적으로 이 비슷한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그 파란 날개의 숨결을 느끼”게 되면서, 불현듯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풀여치는 흔히 풀잎에서 산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내게 앉았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나를 풀잎으로 알았구나. 이 풀벌레에게 나는 풀잎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네. 이 녀석이 나를 풀잎으로 철석같이 믿지 않고 자기를 해칠지도 모르는 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 녀석은 온전한 풀벌레가 못 되고 공포에 떠는 혹은 독이 오른 적이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번개같이 지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풀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여치

이런 구절이 생겨난 것이리라. 또한
“하늘은 맑고 /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에서 나는 이렇게 나를 잊고 풀잎이 되어 풀잎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다 보니까, 어느 색 풀잎은 새가 되어 하늘을 날기도 하고 또 물이 되어 지줄지줄 흐르기도 하고, 다시 저기 뛰노는 아이들이 되기도 하는 등, 이 세상 만물 속에서 내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다. “모든 살아있음의 제자리”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나는 /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 오늘 알았다.”
고 말하게 된다.

옷깃에 날아와 앉은 한 마리 풀벌레에 질겁하는 자세, 벌레는 자연의 보잘 것 없는 미물이니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죽여 버린들 어떠냐는 아주 심상한 태도, 흑인을 벌레 비슷한 흉물로 생각하는 발상법, 여자란 눈물이 많고 본능적이고 비이성적인 이등 인간이니 세상의 중요한 일은 이성적이고 용감한 남성이 도맡아야 한다는 일그러진 생각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들로, 이것은 참인간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며, 참뜻에서의 과학적 사고 식도 아니다.

우리는 풀여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겼는지 날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풀여치가 볼 때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생겨났는가? 아마 풀여치하고도 함께 길을 걸어가는 지구 만물 공동체, 삼라만상 공동체를 만드는 데 만물의 영장이요 꽃으로서의 그 뛰어난 능력을 쓰도록 불림을 받은 존재가 인간이 아니겠는가. 이런 깨달음 위에서 신비로운 은총의 선물인 생태학적 상상력이 이끄는 길을 따라 삶을 살아갈 때에만 우리 인간은 세상에 재앙을 가져오는 존재가 아니라 축복을 안겨 주는 참인간으로 스스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녹색 평론(제9호, 1993)>


스프링노트에서 옮겨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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